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서브스턴스>는 제 2024년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만점작입니다. 덧붙여 두고두고 상기해야 할 인생영화로 자리할 듯 합니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단 한 순간도 웃을 수가 없었고 괴로웠습니다. 고어한 장면들이 선사하는 시각적 충격 때문이 아니라, 저라는 인간을 발가벗기고 뼈 마디 하나하나까지 해부 당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경이로운 상상력과 독창적인 표현력을 총동원하여 외모 강박증 환자의 내면을 낱낱이 시각화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외모 강박증 환자의 사이코 드라마"라 칭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외모 강박증은 일종의 자기애성 인격장애입니다. 내 외모가 아름답고 잘나야만 타인에게 인정과 애정을 받을 수 있다는 뒤틀린 욕구에서 비롯되는데 그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고 결핍에 처할 경우 심각한 자기 혐오에 빠집니다. 고민 끝에 제 이야기를 해봅니다. 저는 중학생 때 드라마 <더 글로리> 수준의 참혹한 학폭과 왕따에 시달렸습니다. 당시 제가 겪은 온갖 멸시 섞인 폭언들 탓인지 키 작고 통통하고 볼품 없었던 제 외모에 문제가 있다고 굳게 믿고, 평생을 "더 아름답고 더 완벽한" 내가 되기 위해 살아왔습니다. 군생활을 제외하고 하루에 두 끼 이상 먹지 않았을 뿐더러 꾸준한 운동 덕분에 배에 복근이 사라져본 적이 없을 정도로 독하게 살아왔습니다. 타인으로부터 결핍을 채우는 것이 목적이기에 자연스레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직업인 배우의 꿈 또한 꾸게 되었구요. 영화 속 엘리자베스가 그러했듯 말입니다.(물론 저는 그녀처럼 정상의 자리에서 빛나는 순간을 맛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엘리자베스와 마찬가지로 "노화"에 직면했다는 사실입니다.
몇년 전 부터 자율신경계에 이상이 생겨 몸의 이곳저곳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이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공황장애와 수면장애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노화가 급격히 진행되더라구요. 자괴감에 사로잡힌 저는 그때부터 얼굴에 의느님의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성형까지는 아니지만 각종 쁘띠 시술에 돈을 펑펑 쓰기 시작했죠. 어떻게든 젊음을 붙잡아두고 싶었거든요. 내 건강은 망가졌을지언정 최소한 내 외모만큼은 지키고 싶었습니다. 세포 분열 활성화 주사를 스스로의 몸에 찔러넣는 영화 속 엘리자베스 처럼 각종 주사들을 제 얼굴에 찔러넣었습니다. 허나 서브스턴스 프로그램에도 규칙이 있듯 시술에도 일종의 규칙이 있습니다. 시술과 시술 사이에는 반드시 일정한 공백 기간을 두어야 합니다. 과한 시술엔 부작용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즉, 영화에서 강조하는 것 처럼 "균형"이 필수입니다. 일시적으로 더 젊고 아름다워진 나와 시술의 효과가 떨어져 노화가 진행되는 나 사이에 말입니다. 허나 두 개의 나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감이 균형을 깨뜨리고 맙니다. 그리하여 영화 속의 수 처럼 욕심을 부립니다. 그렇게 무분별한 시술에 중독되어 갑니다. 결국 전 필러 부작용으로 이제까지 쓴 시술 비용의 대여섯배에 가까운 비용을 들여 대대적인 제거 수술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육체의 고통을 딛고 다시금 무대에 서겠다는 제 소박한 꿈까지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게 끝이 아닙니다. 이미 한번 변형이 된 피부조직은 회복될 수가 없어요. 오히려 상해버린 피부조직이 더 빠르게 노화를 촉진시킬 뿐입니다. 점점 흉측한 괴물로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절규하며 몸부림치던 엘리자베스의 얼굴 기억하시죠? 이거 단순한 영화 속 판타지가 아닌 현실입니다. 그렇게 시술 혹은 성형 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노화를 피하려다, 아니 피할 수 없는 노화를 마주한 자기자신을 끝없이 혐오하며 주체하지 못하다가 끝내 괴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그런 저의 멱살을 단단히 움켜잡고 싸대기를 사정없이 때립니다. "이렇게까지 보여주는데 그래도 말 안 들을래? 균형! 균형! 균형이 깨지면 안된다고 이 자식아!"라며 말입니다.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관리 및 노력하는 자세는 필요하지만 동시에 노화라는 자연스러운 현상을 맞이한 자신 또한 혐오 대신 관용어린 태도로 대하라는 영화의 거침없는 직언에 뼛 속 까지 얼얼합니다. "더 나빠질래? 아니면 적당히 만족할래?"
수치스러운 제 이야기는 일단 여기까지 하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영화 <서브스턴스>를 걸작으로 평가하는 이유를 차근차근 짚어보겠습니다. 서두에 말한대로 이 영화는 시청각적 자극을 통해 공포를 유도하는 단순한 바디 호러물이 아닌, 외모 강박증 환자의 내면을 치밀하고 치열하게 다룬 심리극에 가깝습니다. 극중에서 "하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수차례 반복하여 강조하듯 엘리자베스와 수, 이 둘은 외모 강박증 환자의 육체에 내재된 두 개의 서로 다른 자아를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Elisabeth와 Sue의 철자를 나란히 놓고 보면 한때 데미 무어와 함께 90년대를 풍미했던 미녀 배우 'Elisabeth Shue'의 이름에서 둘의 이름을 각각 따온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영화가 가장 탁월한 점은 이렇게 캐릭터를 양분하는 구조적 형식을 취하며 외모 강박증의 특징을 효과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잠시 영화 속 캐릭터의 이해를 돕기 위해 외모 강박증의 핵심적인 특징을 두 가지 맥락으로 정리해서 설명드릴텐데요. 첫째는 자신의 외모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평가를 영혼의 양식으로 삼는다는 점입니다. 양식이 없으면 배가 고픈 것 처럼 타인의 관심과 인정이 늘 고프고 이것을 꾸준히 섭취해야만 비로소 행복과 안정을 느낍니다. 두번째,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타인의 평가에 민감한게 전부인 것 같지만 냉정하게 실상을 들여다보면 결국 스스로가 자기자신을 평가할 때 양극단을 오가며 천국과 지옥으로 몰아넣는다는 점입니다. 즉, 자아가 분열된 것 처럼 자기만족과 자기혐오 사이에서 스스로를 학대합니다. 분명 똑같은 자기자신을 보고있는데도 마치 거울이 이랬다 저랬다 변덕이라도 부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따라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은 더욱 믿지 못하고 타인의 평가를 거울과 양식으로 삼으려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외모 강박증은 치유되기 어려운 정신질환 중 하나입니다. 심한 경우 인간 관계를 친밀하게 맺는 것 자체가 힘듭니다. 고로 늘 외롭습니다.
영화는 외모 강박증의 심리적 현상들을 디테일하게 따라가며 탐찰하는데요. 늙음과 추함 자체에 대한 공포, 스스로의 관점에서 "늙고 추한 나"와 "젊고 아름다운 나"가 끊임없이 분열하며 혐오와 옹호를 주고받는 과정, 그러한 과정 속에서 자신을 점점 파멸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비극을 스크린에 격렬하게 펼쳐냅니다. 한 발 물러나서 보아도 영화의 예리함과 집요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동창과의 데이트를 앞두고 치장하는 데 열중하던 엘리자베스가 자신과 비교되는 수의 젊고 아름다운 육체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격분하는 시퀀스에서, 앞선 단락에 언급한 외모 강박증의 핵심적 특징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요. "여전히 네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동창의 긍정적인 평가(칭찬 또한 일종의 평가로 인식함)를 되새김질하며 생기를 얻으면서도, 혹여 거기에 부응하지 못할까봐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하여, 그 평가 속에서 자기 스스로 이상화한 존재에 불과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나"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지경까지 확대되는 복잡한 심리를 어찌나 완벽하게 묘사해 놓았는지. 나아가 "아름다운 내가 경멸하는 동시에 동정하는 추한 나"와 "추한 내가 증오하는 동시에 동경하는 아름다운 나", 이렇게 분리된듯 꼬여있는 두 개의 자아가 마침내 서로를 파괴하기 위해 광분하며 사투를 벌이는 장면에서 외모 강박증 묘사의 화룡점정을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클라이맥스도 눈을 떼지 못할 만큼 탁월합니다. 주인공을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괴물로 만드는 데 근본적 원인을 제공한 외모지상주의 사회와 그 구성원들의 시선을 이 악물고 맹렬히 풍자하는데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오마주한 <바비>의 오프닝을, 그 대척점에서 패러디하는 듯한 '몬스트로 엘리자수'의 등장씬 부터 경탄을 자아냈습니다. 또한 비주얼적으로는 피터 잭슨의 초기 작품들인 <고무인간의 최후>, <데드 얼라이브> 같은 B급 고어물을 연상시켰으며, 피를 뒤집어 쓴 주인공이 쇼에 참석한 군중들에게 피를 거하게 뿌리는 장면은 브라이언 드 팔마의 걸작 <캐리>를 오마주하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간 듯 보였습니다. 그녀가 최후까지 과거의 영광을 반추하며 끝없는 바닥으로 사라져버리는 엔딩은 찬연한 동시에 처연하게 그려져 짙은 여운을 남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의 미장센도 완벽합니다. 각본, 연기, 촬영, 편집, 미술, 의상, 분장, 음악, 음향, CG 모든 요소가 흠 잡을 데 없는 완성도를 자랑하며 톱니바퀴 처럼 척척 맞물려 돌아가는 보기 드문 작품이라 봅니다. 특히 각각 다른 이미지들을 이어붙여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내는 '몽타주 기법'이 돋보이는데요. 초반 시퀀스를 예로 들자면 하수구로 쓸려 내려가는 물, TV 프로그램 제작자의 게걸스러운 먹방에 의해 수북이 쌓인 새우 껍질, 와인 잔에 빠져죽은 파리의 이미지를 차례로 보여주며 엘리자베스가 처한 상황을 은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법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영화적 창의성을 한 단계 끌어올립니다. 컬러의 활용도 수준급인데요. '빛난다'는 뜻을 가진 'Sparkle'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빛을 잃어가는 처지에 놓인 엘리자베스의 주요 의상을 블루 톤으로 설정하고, 반면 이제 막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수의 입장을 레드와 핑크 톤의 의상으로 상징하여 대비를 이루는 부분이 가장 눈에 띕니다. 나아가 데이트를 위해 엘리자베스가 입는 레드 드레스, 새해 전야 쇼를 위해 수가 입는 블루 드레스와 같이 캐릭터의 상황과 심경의 변화를 확연히 드러내기 위해 컬러를 스위치하는 부분에서도 영화의 정교한 만듦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흔히 '생명력'을 상징하는 노란색을 엘리자베스와 수가 함께 입는 코트에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서브스턴스 프로그램의 메커니즘과 연결되어 그 의미를 더합니다. 아울러 서양에서 '부활'을 의미하는 계란과 야자수의 이미지 또한 반복적으로 삽입하며 메타포적 기능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가 더욱 진정성과 설득력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주인공 데미 무어 때문입니다. 저에겐 여전히 <사랑과 영혼>의 청초한 여신으로 남아있는 그녀이지만, 전신 성형 중독에 걸린 외모 강박증 환자로 유명하다는게 인간 데미 무어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녀가 이 영화에서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아니 그녀가 반드시 해야 될 역할을 맡았으니 인생 연기로 화답하는 건 어쩌면 당연해보입니다. 마치 <더 웨일>의 브렌든 프레이저가 그러했듯 영화 속 역할이 그녀의 실제 삶과 맞닿아 더 큰 울림을 선사합니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내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아노라>의 미키 매디슨을 열렬히 응원했는데, 이제 바뀌었습니다. 데미 무어로요. 이 작품을 계기로 아픈 과거는 뒤로 하고 그녀의 배우 인생이 다시금 "Sparkle"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온 몸을 좀먹는 암세포 처럼 평생 외모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제 입장에서 이렇게 영화 <서브스턴스>를 분석해보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저라는 인간이 더 좋아질지, 더 나빠질지, 어떻게 될지는... 그저 지금 이 순간, 2024년의 끝자락에서 개인의 암울한 고백이 뒤섞인 장문의 리뷰를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의 연말이 "더 아름답고 더 완벽하길" 기원할 뿐입니다.✨️
☆별점 및 한줄평:
●●●●●(5/5) 영화적 상상과 표현의 한계치를 비웃는 듯 몰아붙이는 지독스러운 풍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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